- 0
- 아포리아
- 조회 수 18059
발표일 | 2020-06-22 |
---|
시간이 지나면서 이른바 ‘K(케이)-방역’이라는 말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 같다. 이 말에 ‘국뽕’이라는 연관검색어가 따라다니는 것을 보면 선을 넘은 것 같다는 게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접두어 케이는 우리 시대의 상징체계를 특징짓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 방역 체계의 탁월성을 부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질병관리본부를 중심으로 하는 체계적인 조사와 처치, 그리고 투명한 정보 공개와 시민들의 자발적 협조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어떤 전범을 제시해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2차 유행의 조짐이 현실화되면서 케이방역에 대한 신뢰가 조금은 떨어지고 있다. 추가 감염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당연히 기쁜 일이겠지만 뉴질랜드의 사례에서 보듯 세계 전체가 초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사회를 정상 가동하는 순간 감염자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백신이 나오지 않는 이상 우리는 단 한순간도 전염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감염 제로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감염원을 고립시켜 확산을 막는 것 말고는 묘책이 없어 보인다. 사람들 역시도 코로나19로 인한 비상사태에 서서히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전염병만큼이나 ‘코로나 블루’(코로나19와 우울감의 합성어)도 확산되고 있다. 이쯤 되면 바이러스와 더불어 사는 삶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마치 현대 경제학에서 실업률 제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이를 경제 시스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성공적인 통치술이라는 것은 이상주의적인 상황을 창출해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의 방역 체계가 서구 자본주의 지역들로부터 주목받았다는 사실 역시도, 정확하게 말한다면 바이러스 박멸 때문이 아니라 바이러스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공 비결이라는 것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지금이 좋은 시절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 즉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신뢰를 사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일종의 시소 위에 올라타 있다. 코로나19에 대비해서 각종 봉쇄 조치를 취하면 코로나 블루에 빠지고, 그렇다고 해서 봉쇄를 완화하면 바이러스가 전파될 수밖에 없다. 상황은 양자택일을 강제하는 듯하다. 경제냐 안전이냐. 한국처럼 무역과 관광 등 대외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라면 이런 고민은 더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 사이에서 규범적 균형을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케이방역이라는 상징이 가리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 방역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는다. 서구 세계에서 중국이 아니라 한국에 주목하는 것은 전염병과 민주주의, 전염병과 시장경제 사이에서 최적화된 정책적 결정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정치적 합리성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창출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기로 위에 서 있다. 안전에 있어서는 감염의 확산을 억제할 것, 인권에 있어서는 강제 조치를 최소화할 것, 시장에 있어서는 불황에 빠지지 말 것 등등.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는데, 마치 두더지 게임처럼 어느 하나를 잡더라도 다른 무엇이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올 상황이다.
물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서는 이 모든 초점들이 파편화되어 나타난다. 2차 유행이 다가오면 ‘국뽕’에 취했던 사실이, 정보인권이 위협받으면 ‘사람이 먼저’라는 구호가 한없이 부끄러워질 것이다. 경제가 위축되고 불평등이 심화되면 ‘이게 나라냐’라던 조롱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올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더 두고 보기는 해야겠지만, 이들 사이에서 규범적 균형을 찾아낼 것이라는 확신은 여전히 힘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