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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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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일 | 2020-0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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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사를 봤다. 코로나19 같은 신종 바이러스는 여성들보다 남성들에게서 감염률이 더 높다는 것. 선천성 및 적응성 면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엑스(X)염색체와 성호르몬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남성들이 바이러스에 더 민감하다는 중국 연구진의 해석이 덧붙여졌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은 이 뉴스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창조적으로 소비하곤 한다. “호르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냥 안 씻어서 걸리는 거지.”
뉴스를 왜 이런 식으로 소비하는 걸까. 무지에 의한 것이든, 앎에 대한 의지 부재로 인한 확증편향이든, 창조적 오독이든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닐 수 있다. 주어진 텍스트의 논리적 규칙을 위반하는 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바이러스뿐 아니라 인종주의 역시 변종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변종의 몇가지 단면을 포착해보자.
영국 축구 선수가 중국인을 비하했고, 네덜란드 항공기는 한국인을 차별했다. 논란이 일자 이들은 즉각 사과에 나섰다. 이럴 때 덧붙는 의례적 해명이 있다. “결코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이게 바로 첫번째 단면이다. 어느 인종주의자도 자신이 인종주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의도적이지 않다는 변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볼까. 사실 그게 더 끔찍하다. 의도적이지 않다면 그만큼 즉각적이고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그들 자신이 인종주의적 혐오를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방증인 셈이다.
오늘날의 인종주의가 무서운 것은 차별받는 이들 안에서도 작동한다는 점 때문이다. 어떻게든 우한 폐렴이라 이름 붙이려는 사람들에서, 새 학기가 시작되면 중국인 학생을 피하고 싶다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서구인에게 혐오받는 한국인들이 중국인을 혐오하는 건 몰상식하지만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다. 이렇듯 사회적 세계에서 가해와 피해의 구도는 대체로 불분명하다. 우리는 피해에는 민감하지만 가해에는 둔감하다. 이런 식으로 오늘날의 인종주의자들은 자기 자신이 피해자임을 내세워 자신의 인종주의를 은폐하곤 한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의 인종주의는 더 이상 생물학과 종족·민족 범주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첫머리의 뉴스 해석이 대표적인 경우다. 사람들은 끝없이 ‘인종화’한다. 즉, 차이를 자연화한다. 따라서 인종주의는 서유럽인이 동아시아인을 대할 때, 또는 한국인이 중국인을 대할 때만 나타나는 게 아니게 됐다. 젠더, 섹슈얼리티, 세대, 계급, 직업적 지위 등 다양한 사회집단 사이에서도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인종주의이다.
오늘날에는 종족·민족, 생물학, 인종주의라는 3자 간의 결합 관계가 예전 같지만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인종주의는 더욱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청년들은 86세대를 인종화하고 기성세대들은 신세대들을 인종화한다. 남성들은 여성을 인종화하고 반대로 여성들은 남성을 인종화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더 이상은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저들 사이의 문화적 습속 차이를 제시한다. 세간에 도는 ‘종특’(종족 특성)이라는 인종주의적 표식이 이미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기성세대는 탐욕스럽고 이중적인 종으로, 신세대는 열정 없고 이익 관계만 좇는 종으로 분류된다. 남성은 용변 보고 잘 씻지 않는 종으로, 여성은 매일같이 머리 감지 않는 종으로 분류된다.
인종주의는 변이를 겪었고 높은 감염성으로 도처에 만연하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처럼 특정 신화(이를테면 민족주의와 우생학)를 깨뜨리는 것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 신종 바이러스 같은 것은 의학 기술과 질병 관리를 통해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연한 인종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은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다.